보수적인 가치관으로 평생을 살아온 주인공 월트의 변화
타인에게 깊게 마음을 열지 않고 홀로 살아가던 월트가 점차 마음을 열어가며 이웃들을 친구로 받아들이고 그들이 맺어가는 관계가, 또 그 과정이 참 좋았습니다. 다른 사람과 어울릴 줄 모르고 보수적인 그가 처음에는 다소 꼰대같이 느껴졌지만, 한국 전쟁을 겪고 누군가를 자기의 손으로 죽인다는 행위를 겪은 인간으로서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하는 무거운 짐, 죄책감이 그의 삶 평생을 짓누르고 있었는데 그의 일생 동안 가족들과도 허물어지지 않던 벽이 이웃집의 몽족 (대다수가 중국인) 아이들에게 점차 허물어지며 그들과 진정한 ‘친구’ 관계를 맺게 되는 그의 모습을 보며 수긍이 갔습니다. 월트는 그저 남들보다 더 솔직하고 언어적, 행동적으로 거침없을 뿐이지 마음은 누구보다 정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정의롭다는 말도 사용하기가 좀 그런 것이 뭔가 월트라면 정의롭고 정의롭지 않은 것은 없다고 할 것 같습니다. 이웃집 소녀 수가 갱에게 몹쓸 짓을 당한 후 자노비치 신부가 월트와 처음으로 진정성 있는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정말 부당하다.”라는 말을 하는데 이에 월트는 “정당(공정) 한 건 세상에 없다.”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이렇게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겪고 봐온 세상은 이러했고 앞으로도 크게 변화할 게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후반부 엔딩에 클라이맥스 부분이 더 와닿는 것은 이런 월트가 택한 방식이 극단적인 폭력이 아닌,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타오와 수를 구한, 노인의 현명한 대처였기 때문입니다. 또 처음에는 진짜 총을 들고 갱을 내쫓고 위협하던 그가 후반에는 가짜 손가락 총을 겨누고 라이터를 꺼내며 죽음을 택하는, 그의 이유 있는 변화가 주는 울림도 컸습니다. 그의 죽음이 그저 한없이 안타깝고 슬프지만은 않게 느껴지는 이유는 이미 이전에 깔아놓은 여러 서사적 이유가 많아서 인 것 같습니다. 그의 외로웠던 인생이 타오와 수 덕분에 무엇이든 혼자이던 (정신적, 물리적) 고독 속에서 벗어나 그들과 관계를 맺어가며 어느 정도 활기를 띠게 됐고 평생을 전쟁 트라우마와 죄책감 속에서 살아왔고 유일하게 자신과 소통한 아내도 죽고 없어 삶에 큰 미련은 없는 상태였습니다. 또 피를 토하는 장면이 꽤 자주 등장했는데 병원 검진을 받은 후 아들에게 먼저 전화를 거는 모습은 그가 곧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것을 암시했습니다. (이 정도면 거의 대놓고 드러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서사적 장치들이 그의 죽음에 어느 정도 타당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한 듯합니다. 인생의 선배로서 타오에게 남자다움을 가르쳐 주고 일을 시키며 자립성을 키워주는 모습과 수의 당당한 면모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 주고 인정해 주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비록 여자와 남자의 성 고정관념이 드러난 부분들이 있긴 하지만.) 굿 윌 헌팅의 교수나 여타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생을 가르쳐 주고 깨닫게 해주는 마냥 따뜻한 인물 유형이 아닌, 월터 코왈스키라서 가능한 그만의 고유하고 독특한 방식이라서 더욱 인상적이고 좋았습니다. 어쩌면 월터 같은 인물이었기에 더더욱 타오에게 더 나은 세상과 삶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자신의 희생으로 그들이 안전하고 평범한 일상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야 기꺼이 희생하고자 마음을 먹은 것이 아닐까 합니다.
클래식 명품 카, '그랜 토리노'의 상징성
영화의 제목이 ‘그랜 토리노’ 인 것처럼 월터의 그랜 토리노는 상징성이 강합니다. 72 년식의 클래식한 명품 차. 오래되어 더욱 가치를 지닐 수 있는 것. 소신 있게 살아온 그의 인생과도, 월터라는 인물 자체와도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누구나 탐 낼만 하지만 누구나 가질 수는 없으며 중요한 가치와 의미를 알고 지닌 자에게만 줄 수 있는 그가 남기는 가장 위대하고 뜻깊은 유산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자신이 자동차 공장에 다닐 때 직접 부품을 조립해 만든 차로 수 십 년의 세월을 지나오기까지 애지중지해온 차를 타오에게 주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이 알고 지내온 기간을 떠나, 또 인종을 떠나서 인간적으로 그들이 얼마나 유대감을 형성했으며 의미 있는 관계를 맺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친구 간의 우정, 또 사람 간의 관계의 유대라는 것은 시간, 나이, 인종과 상관없이 모든 차이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점을 느꼈고 특히 나이에 상관없이 친밀한 관계를 맺어도 이상할 게 없는 미국(서양 국가)만이 가질 수 있는 정서와 자유로운 환경이 부러웠습니다.
<그랜 토리노>를 보고 느낀 점
촬영 기법이나 영화 기법적으로는 특별할 것이 없었고 이야기를 풀어나감에 있어서도 조금 고전적인 방식이었지만 캐릭터와 스토리가 다 한 영화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평면적이던 인물이 관계를 통해 입체적 인물로 변해가고 그 과정을 굉장히 타당하게, 보는 이로 하여금 납득이 가게 전개해 나아가기 때문에 서사적으로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백인 노인 월터를 주인공으로 택하여 갖는 상징과 의미도 잘 이용한 것 같습니다. 어쩌면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월트 코왈스키라는 인물에 자신을 대변해 쓴 작품 같기도 합니다. 그만큼 월트라는 인물이 가지는 성격과 입체성은 실제로 존재할 것만 같이 현실적입니다. 비록 꼬장꼬장하고 보수적인 노인일지라도 자신의 신념은 굳게 지키며 삶과 죽음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그런 어른들이 더 많아지는 세상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좀 더 나은 세상이 올 것만 같습니다. 색다른 방식으로 교훈을 주는 영화를 찾는 이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한국 전쟁을 겪었고 자신이 살아온 역사에 대한 자부심과 그 힘으로 살아가며 보수를 대변하는 월트라는 캐릭터가 저의 외할아버지와 정말 많이 비슷해 보는 재미가 배가 되었습니다. 월터의 츤데레 같은 모습들에서 공감 가는 포인트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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