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read Winner의 의미와 시대적 배경
이 영화의 제목 Bread Winner는 생계를 책임지는 사람, 즉 가장을 의미합니다. 영화 내에서의 가장은 11 살의 어린 소녀 파르바나입니다. 이 소녀가 남장을 하고 가장이 될 수밖에 없던 현실을 보여주며 탈레반 정권 하,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여성 인권 문제의 심각성을 고발합니다. 탈레반 통치 아래의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남성 없이는 여성들이 집 밖에조차 홀로 나갈 수 없었고 여성들이 남성의 부속품처럼 취급받는, 여성 인권이 바닥인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여성으로서의 삶은 폭력에 항상 노출되며 억압이 당연시되는 가혹 그 자체였습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 파르바나라는 여성 캐릭터는 억압에 맞서는 여성이자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굴복하지 않고 상황에 맞서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용감함을 가진 인물입니다. 절대 개인의 힘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구조적 폭력임에도 불구하고 파르바나는 고통을 받고 견디며 포기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여기서 그녀의 삶에 대한 경외심과 그 삶 자체의 숭고함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실사 영화가 아닌 애니메이션이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장점
영화를 보고 <브레드 위너>가 애니메이션이라서 가질 수 있는 장점에 주목하게 됐는데, 만약 이 영화가 실사 영화였다면, 재현하기도 힘들뿐더러 보는 이들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과 거부감을 줄 수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보게 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는 실상을 고발하고 보편적인 사회 문제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데 주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를 전달하는 방식으로는 애니메이션이 보다 효과적이었을 것입니다. 누군가 겪고 있는 실제 고난을 애니메이션으로 보여줌으로써 이를 끔찍한 실제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서 보다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바라보게 하며 또한 그렇게 다가가야 할 필요성을 제시합니다.
<브레드 위너>만의 독특한 이야기 전개 방식
이 영화는 남자 없이는 여자들이 집 밖조차 나갈 수 없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11살의 어린 소녀 파르바나가 남장을 하고 가장 역할을 할 수밖에 없던 이야기와 파르바나가 남동생에게 들려주는 동화 속 옛날이야기가 함께 진행되는 방식을 취합니다. 이야기 속의 이야기인 셈입니다. 영화의 이야기를 설화와 엮어서 비유한 것과 각각이 주는 메시지 전달에 있어 효과적인 구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국가적 폭력의 희생인 술레이만과 파르바나가 대변하는 아프가니스탄의 국민들
옛날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소년 술레이만은 파르바나의 오빠 이름이었는데 비참한 현실에 맞서서 굽히지 않고 싸워가는 그녀의 아바타 같은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파르바나가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힘을 얻는 존재인 동시에 악에 맞서 싸우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자신과 동일시되는 존재인 것입니다. 하지만 술레이만과 파르바나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남성과 여성이라는 점에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절망적 한계 상황 속의 파르바나가 이야기 속 술레이만을 계속해서 외쳤던 것은 자신이 만약 남자였다면, 용감한 소년 술레이만이었더라면, 확고한 용기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한계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이 남성으로 태어났다면 겪지 않았을 것이었고 그게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술레이만도 폭력에 희생 당한 존재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 장면에서의 설화 속 술레이만은 엘레펀트 킹과 마주해 “나는 술레이만 우리 엄마는 작가, 아빠는 선생님. 내 누이들은 매일 다투지. 하루는 길거리에서 장난감을 주웠어. 그 이후로 기억이 안 나”라는 말을 반복합니다. 여기서 파르바나의 오빠 술레이만의 죽음은 그저 길거리에서 장난감인 줄 알고 주운 불발탄에 사고를 당했던 것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어린 소년은 전쟁의 애꿎은 피해자인 셈입니다. 미국과의 전쟁이 다가오고 있던 2001 년의 아프가니스탄이 배경이기 때문에 영화 곳곳에서 전쟁의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고 마지막 부분에서는 전쟁이 발발하기도 합니다. 아프가니스탄의 대부분 남성들은 무의미한 전쟁(종교전쟁)에 나가 죽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술레이만처럼 전쟁의 잔해로 인해 죽거나, 파르바나의 아버지처럼 지뢰를 밟아 한 쪽 다리를 잃은 후에도 종교란 이름으로 감옥에 붙잡혀가는, 이처럼 가정 내 남성이 사라지게 되면서 집 밖을 나가지 못하는 여성들은 고립되어 절망에 놓여 굶어 죽거나 끔찍한 일들을 당하는 악순환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 다시 말해 종교란 이름으로 여성들의 자유를 말살한 이슬람 율법의 모순과 자신들만이 옳다 믿는 욕망의 산물인 전쟁으로 인해 세상이 죽어갈 수밖에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사랑을 강조하는 종교의 모순, 아이러니인 것입니다.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이 영화는 욕망(종교의 타락과 이기적인 욕망에서 비롯된 전쟁)은 사랑(상대와의 소통)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데 “목소리가 아닌 말의 가치를 높여라.”라는 대사가 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목소리만을 크게 내어 주장할 것이 아니라 보다 부드럽게 이야기를 통해 소통을 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는 것 같습니다. 관객들에게 당신의 목소리가 아닌 이야기를 크게 하고,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은 천둥이 아닌 비임을 기억할 것을 당부합니다. 우리는 모두 억압과 편견에 마땅히 맞서 싸워야 하며 이겨내야 합니다. 파르바나와 친구 샤지아같은 소녀들이 이 세상의 어딘가에 분명 존재하며 이들을 둘러싼 환경은 미래를 꿈꿀 수도 없게 하며 순탄한 삶은 기대조차 할 수 없게 만듭니다. 사회의 심각하게 비틀어진, 그릇된 여성상과 여성인권은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여성의 인권이 종교와 권력 앞에서 어떻게 무참히 난도질당하는지를 보여주며 정말 참담할 정도로 여권이 낮은, 아니 여성의 권리라는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보여줍니다. 이를 보고 나와 같은 하늘 아래에서 어떻게 이토록 끔찍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여성들이 있는지 참 안타깝고 분개했는데 한편으로는 그런 곳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에 안도하며 감사해야 한다는 이 사실이 참 아이러니합니다. 차별과 부당함, 불평등이 만연해있는 사회 또 그걸 당연시 여기는 사람들의 태도 또한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종교와 고유의 문화라는 점에서 이런 풍습, 문화까지도 존중해 줘야 하는지 의문입니다. 사람으로서의 기본권은 누구나 마땅히 가져야 하며 여자건 남자건 사람이라는 점에서 모두 마땅히 누려야 할 자유이자 권리, 가치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고 주체로서 존중받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우리가 짐승과 다를 게 무엇이며 그럼에도 우리 자신을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인권이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 사람으로서나 나라의 구성원으로서나 누리고 행사해야 할 자유와 권리를 말하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 개인이 속한 시대와 사회가 종교와 문화라는 명목으로 혹은 어떠한 명목으로든 인격을 박탈하고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을 넘어서 아예 통제하고 억압한다면 절대 존중받아서는 안되며 그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대단한 사상과 문화이길래 함부로 무참히 개개인을 짓밟고 폭력을 휘두른단 말인가.
우리가 마주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들
현재가 되기까지의 인간의 역사를 쭉 둘러보면 분명 이러한 일들은 무수히 많이 행해져 왔습니다. 과거 독일 나치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만하더라도 600만 명에 이르는 유대인이 인종청소라는 명목 아래 나치스에 의해 학살되었는데, 인간의 폭력성, 잔인성, 배타성, 광기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20 세기 인류 최대의 치욕적인 사건으로 꼽힙니다. 이처럼 인류는 역사 속 선례를 통해 잘못을 뉘우치고 배우며 다시는 같은 아픔과 고통을 반복하지 않고자 합니다. 그럼에도 세계 곳곳에서 여러 욕망의 충돌로 인한 인권 침해가 자행되고 있으며 이러한 문제들은 여전히 우리가 마주하고 해결해야 할 국제적인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 개개인 모두는 이 문제들을 직시하며 함께 이에 대해 계속해서 끊임없이 이야기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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